지황 사바 (1767~1795)


'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池璜) 사바는 1767년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1789년 이래 조선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었다. 그러나 1791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그 해 말에 일어난 박해로 인해 이러한 노력은 한 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것은 1793년이었다. 이때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유일(바오로)을 비롯하여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 다음 윤유일은 그곳에 남고, 사바와 요한이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지황 사바는 얼마 안되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사바의 신심에서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훗날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로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황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문모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는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유일과 함께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주 신부는 몇 개월 동안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신부는 신자들의 재빠른 행동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집주인 최인길을 비롯하여 신부의 입국을 도운 사바와 윤유일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내 지황 사바와 동료들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신부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형벌을 받는 중에도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하였다. 그런 다음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사바의 나이는 28세였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의 밀사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사바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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